
I am the one who makes the first move by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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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21일
언젠가 꼭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었던 내용이다. 내가 스스로 노는 종류 중에 가장 취미답다고 말할 만한 게 바로 각종 공연 보러 가는 것일 것이다. 좋아하는 밴드나 가수의 라이브, 발레단의 정기 공연, 연극이나 오페라, 뮤지컬, 미술 전시회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 등을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만큼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대 이후로는 예전만큼 부지런하게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떤 공연이든 라이브, 라는 것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역시 좋아하는 밴드의 라이브들이다
우리나라 가수나 밴드의 라이브에도 종종 가긴 했지만, 내 애정의 원류는 거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고, 그게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문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한 시기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이었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이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시기인 의무교육 시절에는 "대학만 가면"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그리는 게 일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을 좀더 열렬하게, 좀더 많이 사랑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 당시 뮤직 비디오를 틀어주는 감상실에만 가도 흥분되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직접 공연장에 가서 그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원래 rock kids는 몽상가에 폼생폼사가 되기 마련이다
과연 대학에 갔고, 그 이후로 10여년을 관통하며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가려고 했다. 설령 그들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나 밴드가 아닐지라도, 수백번, 수천번의 라이브로 다져졌을 외국 밴드들의 공연은 늘 멋질 것이고 또 기본적으로 rock band의 라이브는 그게 누구든 재미있기 마련이니까, 라는 게 내가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편견 중의 하나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게 누구든 이들의 라이브가 다시 열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밴드는 언제고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내한 공연하는 밴드들의 라이브 가격은 7만원을 유지했다. 최근 몇년간 다녀온 적이 없어서 이즈음의 시세는 잘 모르겠는데, 물가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시대를 거치면서도 오랫동안 7만원은 고정 가격스럽게 그 자리를 유지했다. 지금은 10만원 선으로 대충 생각하고 있지만.
하여간 기억나는대로 한번 더듬어 보려 한다. 그 중에서는 정말 좋았던 공연도 있었고, 아쉬운 공연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뻤던 공연도 있었다. 십몇년전부터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시대 순서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정확히 생각이 안 나기도 하고:Q
Bon Jovi / 1995년 / 올림픽 체조 경기장 (아마도?) / 김샤이 / 7만원 엄밀히 Bon Jovi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Bon Jovi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밴드 중의 하나였고, 자신들만의 장점을 가진 좋은 밴드였다. 록음악을 처음 듣는 애기들은 이들의 음악이 너무 대중적이고 팝스럽다고 해서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는데(무슨 통과의례처럼 거치게 되는 몇몇 절차가 있음-_-), 그런 꼴도 참 같잖기도 했고. 물론 이 밴드의 인기에서 리더인 Jon Bon Jovi의 외모를 아주 빼놓을 수는 없지만, 대중 음악에서 그게 마이너스일 리는 없다. 마치 Beckam에게 얼굴때문에 유명하다, 라는 말을 하는 격이지. 아무튼, 동행한(이라기보다는 나를 데려간) 자기인 김샤이는, Bon Jovi의 팬클럽 회원이었을 만큼 열렬한 팬이어서, 나는, 우리는 그 덕에 엄청나게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태지boys의 콘서트나 015B의 라이브, 수능 끝나고 바로 갔었던 이현석의 소극장 라이브 등을 다니긴 했지만,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해외 뮤지션의 대형 콘서트는 처음이었던 것. 게다가 앞줄로부터 세어서 네번째 자리!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정말 아무것도, 심지어 서울 지리조차-_- 모르던 시절이라, 난 자기가 이끄는대로 따라가기만 해서, 공연장 부대 사항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불은 꺼졌고, 환호성 소리가 깊어지며 Bon Jovi 등장! 지금 생각나는 것은 Jon이 슬리브리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 그 슬리브리스에 글씨가 써 있었는데 그 글씨가 훤하게 다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는 것. 마구 의자에 올라가며 환호하는 언니들을 따라 나도 똑같이 흉내내며 환호를 보냈다는 것. 그리구 자기가 뭔가 팬클럽 간부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했었다는 것-_- 등등; 안타깝게도 음향이나 음질 등에 대해서 판단할 내공은 전혀 없던 시절이고. 그저 눈앞 고작 몇미터 앞에서 라이브를 하는 이 분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기억. 게다가 어쩌면 마지막 록음악의 전성기였던 90년대, 밴드의 최전성기 중 하나였던 시절에 그들의 젊은 라이브를 볼 수 있었던 행운. 공연을 잘 즐기고 나와서,...문제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집이 수원인데, 지하철 외에는 통행 수단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학교 근처 외에는 서울 지리도 전혀 몰랐고! 공연이 꽤 늦은 시간에 끝났고, 늦게 끝났으면 그대로 샤이군의 집에 가서 잤으면 간단한데, 왠지 그런 생각이 안 떠오르고 늦던 말던 집에 꼭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방법을 강구하다가, 오랫동안 걸었는데 지하철 역이 죽어도 나오지 않아서, 그만 깜깜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참 황당하고 약간 무섭기도 했는데, 여기서 무서운 건 늦은 밤이라거나 험한 세상이 아닌 엄마가 무서운 거였다-_-; 핸폰도 없던 시절이니 이건 뭐 연락을 취할 방법도 공중전화 뿐이었다. 보니까, 시외로 나가는 택시가 승객을 모으고 있었다. 안양까지 간다는 전갈. 일단 타기로 했고, 이미 시간은 11-12시로 향해가고 있었고, 합승했던 아줌마와 아저씨는 대화 중에 드러나길 불륜 관계였고-_- 이들이 내리자 택시 아저씨는 바람피는 주제에 어쩌고 하며 씹어댔고-_- 난 왠지 이 불륜커플이 인상에 강해 이 다음에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집에 도착하니 1시 반이었다!! 지금이야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두달인지 세달만에 과연 대학교 가서 망가진-_- 자식의 새벽 귀가 뭐 이런 분위기. 계속 말하지만 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저 놀란 부모님. 그리고 정말 억울하게도-_- 이 사건 이후 나에겐 curfew가 생겼다. 무려 11시. 딱 죽고 싶었다. 학교 통학 시간만 2시간인데, 이런 통행금지는 정말 불공평하다는 항의를 향후 따로 나와 살게 될때까지 한듯...뭐 그렇다고 내가 저걸 지킨 건 아니지만; 하여간, 이러저러한 일들로 기억에 남는 Bon Jovi의 내한 공연이었다:Q
Michael Jackson / 1996년/ 잠실 주경기장 / 상철 선배, 석희 / 5-6만원? 오랜 MJ의 팬이다. (농구 MJ의 팬이기도 하고..) 그의 모든 앨범이 일일히 감동적이었고, 팝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 분명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의 재능과 음악과 무대들. 역설적이게도, 하지만 황제인 그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공연장을 주경기장으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 점이 첫 시도에 나를 망설이게 한 요인이 되었다. 무대 앞을 커버하는 플로어는 당시 10만원을 훌쩍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달에 30만원 벌어서 용돈쓰던 시절이라, 도저히 그 반에 가까운 돈을 티켓값으로 날리고 한달을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럼 스탠드에서 공연을 봐야 하는데 맨눈으로 보면 잘 보이지 않을게 뻔하고...그런저런 핑계들로 망설이고 있던 건, 일단 확실하게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던 듯. 그러다가, 공연을 며칠 앞두고 (공연은 3일인가 5일을 했던 것 같다) 같은 과에 또다른 MJ의 빅팬이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발견. 단박에 의기투합이 되어 버렸다. 두학번 위인 상철오빠와 새내기였던 석희. 한번에 결정을 해버리고 바로 표를 샀다. 5-6만원 정도의 가격이 낼 수 있는 타협이었지만, 공연은 금새 또 사람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함께 걸어갔던 길이 좀 기억에 남고. 우리는 무대에서 보면 왼쪽으로 치우쳐진 스탠드. 우리 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기운 곳의 자리였는데, 역시 예상대로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무대 양사이드로 대형 멀티비전이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MJ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두근두근,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의 무대는 또한 여러 장치들과 볼것 많은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과연 그는 온 무대에 불꽃을 튀기며 무대 아래에서부터 솟아 오르는 등장을 보여준다. 손가락 크기로 보이긴 했지만, 그는 등장부터 관객을, 팬들을 사로잡았고, 그의 열정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훨씬더 즐길 수 있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자리에서 뛰면서 황제를 지켜봤다. 그리고 어느 노래였던가, 왠지 모두 가슴이 벅차올라,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의 무대 자체가 내겐 감동이었지. 소리소리 지르면서 뭉클해지면서, 그렇게 그의 공연에 묻혔다 가슴을 온통 채워 공연장을 걸어나오며,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것이 플로어 좌석을 사지 않았다는 사실임은 함께 간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이후로, 절대로 제일 비싼 티켓만을 사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대체로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라이브에서, 그것은 반드시 제 값을 한다. 그리고, Bon Jovi의 1년 전 공연 후로, 퇴로 확보는 공연 오기전에-_- 치밀하게 해두는 습관이 들어, 대부분 공연이 꽤 늦은 시간에 끝남에도 별 문제없이 귀가할 수 있게 되었다;;;
Blur / 1997년 / 정동 극장 / 권빵 / 5만원 시애틀 신의 마지막과 브릿팝의 절정기에 이르며 국내에서 영국 밴드들의 인기가 상당히 높아진다. 예나 지금이나 조류와 상관없이, 내게 뻗치는 음악을 주로 들으며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시대에 이끌려가는 것을 일부러 거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nirvana와 oasis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부디 내 시대의 우주가 beatles나 led zeppelin 같은 것이기를 바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nirvana와 oasis의 우주면, 충분했었지 싶다 하여간, blur를 좋아하게 된 건 1994년, 그들의 앨범이 국내에 첫 출시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사실 훨씬 이전부터 활동하던 밴드였고 이미 앨범도 냈던 밴드이지만,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parklife 앨범의 girls and boys가 mtv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듯. 사실 난 그 이후의 브릿팝 열풍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어서, 이후에 줄줄이 소세지처럼 나왔던 여러 밴드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rock kid의 쓸데없는 똥고집이란 게 있음; 이 역시 routine임;;) 하지만 blur는 그 모든 흐름 이전에 내게 뻗쳤던 밴드인지라, 계속해서 관심을 둘 수 있었다. 난 대개 밴드를 좋아하면 기타리스트를 좋아하게 됐는데, blur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보컬인 damon이 너무도 눈길을 잡아 끌었다. 보컬은 조금...나대고 귀엽고 엉뚱하면 취향이다. 아니 취향이라기보다, 그게 보컬답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다. (RHCP의 anthony나, aerosmith의 steven tyler 아저씨-_-;;;;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을 까뒤집고 노래를 부르는 damon은 그 조건에 훌륭하게 부합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게 트릿하고 헛헛하다는 듯한 조금 거만하고 지루함을 느끼는 눈빛. 더벅 머리도 귀엽고. 하여간 권빵이 공연을 가자고 꼬셨다. 예나 지금이나 뭔가 하자고 하면 그다지 저항없이 하는 편이다. 문제는, 그 때가 중간 고사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권빵군은 당시 학교 사정(휴업인지 파업인지)으로 시험 기간과 상관없는 시간대였던 것 같고, 나는 중간 고사 정중앙이었지...물론 당일에 시험이 있다거나 그 다음날 시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그 다음다음날 시험이 있었던 것 같다. 수업이 없으니 시간맞추기는 유연한데, 사실 시간맞추기고 뭐고 평소에 안하던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일반역학!! 시험이었던 것이다. 일반역학은...쉽게 말해 말도 안될 정도로 짜증나게 까다로운 과목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배우는 물리 공식들을 증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배운다. 미적분은 물론 하여간 지금은 잘 생각도 안 나지만 지랄맞도록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공부시간은 좀 확보되었으니 예쁜 원서(어렵고 재미없는 과목을 배울때면 텍스트북이 얼마나 예쁜지 따위로 지루함 수습-_-)를 한장한장 읽으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다가온 유혹. 좀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공연에 가기로 했다. 가고 싶었다. 공부를 하기 싫은 마음도 당연히 작용을 했다. 그리고 죄책감이 반작용했다. 이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밀고땡기는 변태짓을 하기로 한 셈. 이 때쯤이면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 나와 살 때이다. 권빵군은 일단 집으로 왔다. 표값은 5만원이고, 그리고 스탠딩 공연이었다. 작은 클럽 규모의 스탠딩은 몰라도, 이런 내한 공연 사이즈의 스탠딩 공연은 이게 첫 경험이었던 셈. 요즘엔 다른 방법이 강구되는 것들 같지만, 어쨌든 이때는 선착순이었던 지라, 그렇다고 아아주 일찍 가서 밤새는 짓을 할것들은 아닌 것 같고 해서, 적당한 시간에 점심 먹고 공연장으로 나섰던 듯. 정동극장은 내한 공연장 치고는 꽤 작은 편이었지. blur가 아직은 국내에서 팬층을 깊이 형성한 메이저급은 아니었으니. 하여간 쭐레쭐레 가 보니 줄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뒤인 것 같지는 않고, 적당했다. 앞으로 몇시간을 이러고 있어야 할 테다. 이를 예상, 나는 일반역학 책을 들고 갔었지 ㅋㅋㅋㅋㅋㅋ 그런 상황에서 공부가 되냐고들 하지만, 난 의외로 주위가 시끄러우면 긴 시간은 아니라도 짧은 동안 집중력이 확 오른다. 털퍼덕 주저앉아서는 예제 위주로 보면서 남은 분량을 조금씩 채워 나갔다 그리고 몇시간 뒤 입장. 가방을 꼼꼼히 챙기고 놓치지 않게 잘 둘러멘 뒤 차곡차곡 쌓여 들어갔다. 아주 가깝진 않았지만, 아주 멀지도 않았고, 올려다보기 좋은 각도. 다행스러웠던 건 여성팬이 훨씬 많았다는 점. 만약 남자애들이 많이 왔다면 크지 않은 공간에서는 꽤 난감해진다. 하여간 불은 또 꺼지고, 그야말로 뮤직비디오스러웠던 blur의 공연이 시작된다 너무 신났다. 폴짝 폴짝 잘도 뛰며 놀았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밀려다니느라 조금씩 위치를 달리하며 멤버들을 볼 수 있었다. 동행한 권빵은 물론 bassist인 alex를 좋아했는데, 이날 alex가 유난히 멋지긴 했다. 갑작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베이스에 꽂았다가 다시 거기서 입으로 가져가 담배를 물고 베이스를 튕기는데~으아악. 이날 이거 보고 따라해보겠다고 한 사람 참 많았지...-_-; damon은 실물이 훨씬 입체적이고 또 역시나 귀엽고, 모두 라이브에 익숙해 보이는 여유로운 무대였다. 세세한 디테일은 역시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음량이 그렇게 컸던 것 같지는 않다. 스탠딩 콘서트가 막 도입되던 시기라 관객들의 시행착오도 좀 있었겠고, 나도 권빵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렇게 자리잡고 헤매던 와중 그 사람 낑기는 꽉찬 곳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기도 했지-_-;;; 하여간 별말 없이 휘리릭, 아기자기하고 blur 같은 공연을 보여주었고, 그 흥겨움에 잘 뛰어 놀다 왔다 참, 이날 아침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당시 어학당 담임(이전 학기 담임이었을지도 모름;)을 길에서 만났다. 머리를 기른 이 미국 아저씨 또한 동네 근처에 사느라 종종 마주치곤 했었다. 외모답게 이 아저씨 역시 rock을 좋아해서 이런 저런 밴드 얘기를 가끔 하곤 했는데, 내가 blur 콘서트에 간다니까 첨에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아니 미국 아저씨라 blur를 모르나, 하지만 이 아저씨 정도면 blur를 모르기란 불가능한데, 라고 머릿속으로 굴리며 안타깝게 blur를 연발하는데, 선생님 왈, "아, 블러~rr~ㄹ!!" -_-;;;; 내가 아마 발음을 "블러"라고 했던 모양-_-... 이 공연의 후일담. 일반 역학 결국 D 맞았다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치부에 부끄러움이 없군-_-; 결국 4학년 때 재수강해서 B로 마무리했다. 우리 학교는 +와 -가 없이 4.0 만점이었음;; 하지만 공연을 보러 갔다온 뒤 본 시험은 그럭저럭 봤다는. 문제는 기말고사였지...whatever...
이거 시작했더니 의외로 대단하구나. to be continued
2008년 07월 18일
UP FRONT
Remember when athletes had the guts to stand up for their beliefs?
운동선수들이 신념을 위해 떨쳐 일어날 만큼의 용기를 보여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나는가?
by Stephen A. Smith
It's late August in Beijing, and the U.S. has just taken basketball gold. But while everyone awaits a celebration by LeBron James and Kobe Bryant, Dwyane Wade and Dwight Howard, there's a somber look on the athletes' faces as they climb the medal stand. Suddenly, their black-gloved fists are raised to the heavens, reminiscent of the protest at the 1968 Mexico City Games. Shockingly, with little regard for themselves, multimillionaire Olympians have decided to make a high-profile call for human rights in China, honoring the legacy of Tommie Smith and John Carlos without worrying about what it will cost.
8월 말의 베이징에서였다. 미국은 막 남자 농구에서 금메달을 따낸 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Lebron James와 Kobe Bryant, Dwyane Wade와 Dwight Howard의 환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상대에 오르는 선수들의 얼굴은 우울했다. 갑자기, 그들은 까만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치켜올렸다.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일어났던 항의, 그것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다. 놀랍게도 백만장자의 이 올림픽 출선 선수들은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중국에서의 인권 문제에 대한 선명한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Tommie Smith와 John Carlos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대가를 치룰지에 상관없이 행동했던 그 유산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We can always dream, can't we? 우린 꿈꿀 자유가 있지...그렇지 않수?
We can dream that at least some of today's athletes will remember how Smith and Carlos captured gold and bronze, respectively, in the 200 meters, and why they raised their fists in a "black power" salute for the world to see. We can dream about the future the two runners hoped for. And we can be thankful that on July 20, long after their righteous, justifiable act, two of America's most distinguished Olympians will be honored with the Arthur Ashe Award at the ESPYs. 우린, 오늘날의 운동 선수들 중 최소한 몇명이라도 Smith와 Carlos가 200미터 경기에서 어떻게 금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따냈고, 왜 전세계가 볼 수 있도록 "블랙 파워" 경례를 위해 주먹을 치켜들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라고, 꿈꿀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달리기 선수가 소망했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그 올바르고 정당했던 행동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7월 20일, 미국의 가장 두드러진 올림픽 선수였던 이들이 ESPYs에서 Arthur Ashe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을 것이란 사실에 감사해 할 수 있다
"Let's face it," says Harry Edwards, the sociologist, civil rights activist and former Black Panther Party member who sparked the whole thing. "In any other country on the face of this earth, Tommie, John and I would be either dead or in somebody's dungeon." "직시하자구요." Harry Edwards의 말이다. 그는 사회학자이자 민권 운동가이고, 전 Black Panther Party의 회원으로서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된 인물이다. "이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Tommie와 John, 그리고 저는 죽거나 누군가의 지하 감옥에 갇혔을 겁니다."
What happened to Smith and Carlos was bad enough. They were emotionally bludgeoned with death threats and labeled unpatriotic because of a simple gesture of defiance. It began with Edwards, then a professor at San Jose State, who'd been looking for ways to call attention to his belief that the civil rights movement had not gone far enough to eradicate injustices for black Americans. Setting his sights on sports as a medium for the message, Edwards organized a group called the 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 which called for an all-out boycott of the 1968 Summer Games. That ambitious goal wasn't attained, but with the help of Smith and Carlos, two track stars at San Jose State, it morphed into a historic moment. Smith와 Carlos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비애국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했다. (권위에 대한) 간단한 도전의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 이 일은 Edwards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산호세 주립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민권 운동이 미국의 흑인 시민들에 대한 권리 침해를 근절시킬 만큼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다는 그의 믿음에 주위를 환기시킬 방법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 메시지를 전달할 매개체로서 스포츠를 점찍은 Edwards는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라는 그룹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1968년 하계 올림픽 전면 보이콧을 요구했다. 이 야심찼던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산호세에 있던 두 트랙 스타인 Smith와 Carlos의 도움 덕에, 그것은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As "The Star-Spangled Banner" played and the American flag rose above the medal stand, both athletes bowed their heads. Then Smith, wearing a black glove on his right hand, closed his fist and raised it as a sign of black power. Carlos raised his left, black-gloved fist as a symbol of black unity. The black scarf around Smith's neck represented black pride. Their black socks (neither man was wearing shoes) represented economic hardship; at the time, 29% of Americans living in poverty were black (blacks made up 19% of the U.S. population). 미국국가가 울려퍼지고 시상대 위로 성조기가 올라갈 때 두 선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서, 오른쪽 손에 장갑을 끼고 있던 Smith는 블랙 파워의 상징으로서 주먹을 쥐고 높이 치켜 올렸다. Carlos는 흑인 단합의 상징으로 까만 장갑을 낀 왼주먹을 들어 올렸다. Smith의 목에 감겨진 까만 목도리는 흑인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까만 양말(둘 다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당시, 빈곤층의 29%가 흑인들이었다 (흑인은 당시 미국 인구의 19%를 차지하고 있었다)
The backlash was swift and immediate. Smith and Carlos were suspended from the national team and banished from the Olympic Village. America, shamed and exposed, was enraged by their actions. "Once we got back, we were ostracized, even by our own," Smith says. "Folks were scared, man. No jobs. We couldn't find work. People even told us, 'We can't get close to you guys because we have our own jobs to protect.' These were my friends. At least they were my friends before I left for Mexico City." 반발은 신속하고 즉각적인 것이었다. Smith와 Carlos는 국가 대표팀으로부터 제적당했고 올림픽촌으로부터 쫓겨났다. 창피를 당한 채 노출된 미국은 그들의 행동에 격노했다. "돌아가자 우리는 추방당했습니다. 우리 동료들로부터도 말입니다." Smith의 말이다. "친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구요. 직업을 구할 수 없었죠. 우린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과 가까이 지낼 수가 없어. 우린 지켜야 할 직업이 있거든.' 그 말을 한 게 내 친구들이었습니다. 최소한 제가 멕시코 시티로 떠나기 전까진, 친구들이었습니다."
And Edwards? His career was over at San Jose State. "And of course," he says, "[FBI director] J. Edgar Hoover took a personal hand in managing, let us say, my portfolio at the FBI—3,500 pages of documents, speeches, communications from informants who'd been placed in my classes. I was persona non grata at most athletic venues, as well as abroad. Throw that in with the death threats, and it was a pretty stiff hand." Edwards는? 산호세 주립대에서의 그의 커리어는 끝장났다. "물론," 그의 말이다. "[FBI 디렉터인] Edgar Hoover가 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 개인적으로 관여했죠. 이렇게 말해 보죠. FBI에서 제 프로파일은 문서, 연설, 제 수업에 참관했던 정보 제공자들과의 대화 등을 담은 3,500쪽 짜리였습니다. 대부분의 운동 관련 장소에서 저는 기피 대상이었고, 그건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죠. 그것에 살해 위협까지 더해졌으니, 참으로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Life eventually dealt them better cards. Both Smith and Carlos went on to teach and coach, and Edwards is a professor emeritus at UC Berkeley. It's nice to see recognition for the two former medalists on the eve of another Olympics. But at the same time, to participate in the Beijing Games, athletes are now required to sign waivers promising that they won't engage in any kind of protest or demonstration at Olympic venues. It's ironic at the very least. Not to mention pathetic, weak and un-American. That's right, I said it! 시간이 흐르며 좀 나아지긴 했다. Smith와 Carlos 둘다 가르치고 경기 지도를 할 수 있게 됐고, Edwards는 UC Berkeley의 명예 교수이다. 또 다른 올림픽을 앞두고 전 메달리스트들이 재인식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곳에서 어떤 종류의 주장이나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웨이버에 사인을 해야만 한다. 최소한 이건 아이러니하다. 애처롭고, 허약하고, 비미국적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맞다. 그렇게 말했다구!
Olympic organizers can try all they want to keep the Games nonpolitical. That won't stop Tibetans at home and abroad from protesting Chinese repression. And it certainly shouldn't stop today's U.S. athletes, collectively and individually more powerful than ever before, from saying or doing something that transcends sports instead of being limited by them. I don't care if it's in the form of a small quote or a big gesture. Nor do I care if it's from LeBron, Tyson Gay or whoever wins the modern pentathlon. 올림픽 관계자들은 경기들이 비정치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그들은 티벳사람들이 국내외적으로 중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오늘날의 미국 선수들을 멈추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집단으로 있을 때나 개인적으로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그들이 행동반경을 제한당하는 대신, 스포츠를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안된다. 난 그게 그저 말 중의 작은 인용이든 큰 몸짓이든 형태는 상관 안 한다. 그게 Lebron으로부터 나오든 Tyson Gay로부터 나오든, 혹은 근대 5종 경기에서 승리한 누구로부터 나오든 상관없다
In recent history we've seen Michael Jordan and Tiger Woods break records and break down stereotypes. But let's be real: When it comes to political activism, American sports has lacked a spokesman for years. 최근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Michael Jordan과 Tiger Woods가 기록을 갱신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을 보아 왔다. 하지만 현실적이 되어 보자: 정치적 행동주의라는 측면에서 미국 스포츠는 몇년간 드러내어 말을 해 줄 이들이 없었다
Muhammad Ali and Jim Brown are long gone from the spotlight, and Ashe left the stage far too soon. The closest thing we have to a truth-teller today is Charles Barkley, who's conveniently dismissed as "Charles just bein' Charles" whenever folks want to ignore the legitimacy of his criticism. Muhammad Ali와 Jim Brown은 스팟라잇으로부터 멀어졌고, Ashe는 너무 빨리 무대를 떠났다. 오늘날 진실을 말하는 행동에 가장 가까운 일을 하는 이는 Charles Barkley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의 비판의 합리성을 무시하고 싶을 때마다 "Charles는 원래 그러니까"라는 말로 쉽게도 그는 잊혀진다.
Think about it! The African-American stars of the 1930s through the 1960s, from Jesse Owens to Jackie Robinson to Bill Russell, met the obligations of their time. They helped break down segregation—what Edwards terms "the absolute cultural and political presumption that blacks were, by genetic design, unfit to compete with and against whites in sports." 생각해 보라고!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흑인 스타들은, Jesse Owens부터 Jackie Robinson, Bill Russell에 이르기까지, 그들 시대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분리정책(*공공 기관에서의 흑백 분리를 말합니다. 흑인만 다니는 학교, 호텔, 화장실 등등*)을 무너뜨리도록 도왔다. Edwards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분리정책)은 "흑인들이, 유전자적으로, 스포츠에서 백인들에 대항해 경쟁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절대적으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가정"이다
Decades later, despite (or perhaps because of) riches and fame and a significant decline in overt racist practices, today's athletes show very little interest in standing up for or against something bigger than themselves—whether it's war, tyranny, economic deprivation or global warming. Who among them will have the conscience to embrace the challenges that lie ahead, no matter what the sponsors or, yes, the TV networks, think? 몇십이 지나고 부와 유명세와 인종주의적 폭력의 명백한 수그러듦에도 불구하고(아니면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의 운동 선수들은 자신들보다 더 커다란 문제들-그게 전쟁이든, 독재든, 불황이든, 지구 온난화든 간에-에 목소리를 내는 것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 누가 대체, 스폰서나 그래, TV 네트워크에 상관하지 않고, 그들 앞에 놓인 도전을 받아들일 의식을 지녔다고 생각하는가?
"Remember, no one saw Martin Luther King coming," Edwards says. "He was a young, second-level preacher. Nobody saw Malcolm X coming out of prison. Nobody saw Tommie Smith, John Carlos and Harry Edwards coming out of San Jose State. I'm convinced that, irrespective of what we think we see from a social and political standpoint relative to this generation of athletes, there's somebody out there whom we simply don't see coming. I don't think we are wise enough or visionary enough to say that this generation is lost or that this generation can't get it done. Keep the faith." "기억해 봐요. 아무도 Martin Luther King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죠." Edwards의 말이다. "그는 젊은 부설교자였어요. 아무도 Malcolm X가 감옥으로부터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Tommie Smith와 John Carlos, Harry Edwards가 산호세 주립대로부터 나타날 거라고 생각 못했잖아요. 지금 세대의 운동선수들과 관련한 사회정치적인 관점으로부터 우리가 보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상관없이, 저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이고 지금 세대는 끝장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현명하거나 앞을 내다볼 줄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믿음을 가져요."
We know what the hope is. But what about the reality, in light of all the money on the table and its tremendous power to manipulate? Think about those antiprotest waivers, the ones everybody is apparently all too willing to sign, and tell me that any modern-day star will use his or her platform to speak up about terrorism, sweatshops in third-world countries or other unspeakable human rights violations.
Which leaves us with a question: Do we even care anymore? The way Tommie Smith and John Carlos did—and still do? 우리는 무엇이 희망인지 안다. 하지만 걸린 판돈과 그게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조종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현실은 어떤가? 그 저항운동에 반대하는 웨이버를 생각해 보라고. 모두가 명백히 너무도 거리낌없이 사인한 그 웨이버 말야. 그리고 이 시대의 어떤 스타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테러리즘과 제3세계 국가의 노동착취, 혹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인권 침해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지 말 좀 해 주셈. 이로부터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남겨진다: 사실 우리가 더 이상 이에 관심이 있긴 한 건가? Tommie Smith와 John Carlos가 했던 방식-아직도 하고 있는 방식에?
For a brief history of athletes and protests check out this photo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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